‘칩을 더 달라’는 문장을, 방향이 아니라 협상력으로 읽기
“빅테크가 칩을 더 달라고 아우성친다”는 헤드라인을 보면 사람들은 곧장 “그럼 주가가 오르겠네”로 건너뛴다. 이 점프가 문제다. 부족은 방향(오른다/내린다)이 아니라 협상 테이블의 무게중심을 알려주는 지표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얼마에 팔지’를 정하는 힘이 공급자 쪽으로 이동한다. 이걸 산업에서는 공급자 협상력이라 부른다. 협상력이 기울었다는 것은 마진에 반영될 여지가 생겼다는 뜻이지, 그 여지가 실제로 얼마나·언제 실현되는지, 그리고 그게 주가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래서 상록수 관점에서 봐야 할 질문은 “오를까?”가 아니라 이것이다. “이 협상력은 어디서 나오고, 얼마나 오래 재생되는가?” 여기서 삼성·SK가 ‘동맹 중심축’으로 불리는 이유가 갈린다.
두 종류의 레버리지: 규격 부품형(HBM) vs 전환비용형(파운드리)
같은 ‘공급 부족’이라도, 협상력의 근원은 사업 구조에 따라 다르다.
HBM은 규격 부품형 레버리지다. HBM은 표준(JEDEC 규격 등)을 따르는 메모리다. 규격화됐다는 건 이론상 대체 공급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협상의 핵심이 “물량을 언제, 얼마의 수율로, 얼마에 대느냐”에 집중된다. 이 레버리지는 강력하지만 사이클을 탄다. 증설이 따라붙고 수율이 안정되면 부족은 완화되고, 협상력의 무게중심도 다시 이동한다. (메모리 사이클의 가격 메커니즘을 별도 가이드에서 다룬 이유가 이것이다.)
파운드리는 전환비용형 레버리지다. 고객사가 특정 공정 노드에 맞춰 칩을 설계하면, 다른 파운드리로 옮기는 데 재설계·재검증이라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이 전환비용이 관계를 ‘끈끈하게’ 만든다. 부족이 완화돼도 이미 그 공정에 묶인 고객은 쉽게 떠나지 못하므로, 협상력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성격이 있다. 대신 이 레버리지는 앞선 노드(선단 공정) 확보라는 기술 경쟁에 크게 의존한다.
핵심: HBM의 협상력은 ‘사이클과 함께 숨 쉬고’, 파운드리의 협상력은 ‘관계에 축적된다’. ‘동맹 중심축’이라는 한 단어 뒤에 사실 성격이 다른 두 힘이 겹쳐 있다.
‘동맹 중심축’이라는 서사를, 캡티브 수요라는 숫자로 검증하기
기사 헤드라인의 ‘중심축’, ‘동맹’ 같은 단어는 서사다. 서사는 검증 가능한 숫자로 바꿔야 상록수 자료가 된다. 여기서 봐야 할 개념이 캡티브 수요(captive demand) — 시장에 나오기 전에 이미 계약으로 잡혀 있는 수요다.
관찰 포인트는 이런 것들이다.
- 선주문·장기공급계약 비중: 생산능력의 얼마가 이미 계약으로 묶여 있는가. 높을수록 ‘중심축’ 서사가 구조로 뒷받침된다.
- 상위 고객 집중도: 상위 몇 개 고객이 매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집중은 협상력의 원천이자 동시에 리스크(고객 이탈 시 충격)다. (이 양면성은 고객 믹스 가이드에서 다룬다.)
- 계약부채·선급금: 재무제표의 계약부채·선수금 항목은 ‘고객이 미리 돈을 걸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숫자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중심축’은 분위기일 뿐이다. 반대로, 부족 국면이 지나가도 캡티브 계약이 두껍게 남아 있다면 그 협상력은 사이클보다 오래간다.
왜 이 개념이 사건이 지나도 유효한가
‘2026년 어느 분기의 HBM 부족’은 사건이다. 사건은 지나간다. 하지만 “공급 부족을 방향이 아니라 협상력의 기울기로 읽는다”, “레버리지의 근원(규격 부품형 vs 전환비용형)을 구분한다”, “서사를 캡티브 수요라는 숫자로 검증한다” — 이 세 가지 렌즈는 다음 부족, 그다음 부족에도 반복해서 쓸 수 있다.
AI든 그다음 무엇이든, “칩을 더 달라”는 아우성은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헤드라인의 흥분을 이 세 렌즈로 걸러내면, 무게중심이 정말 공급자에게 있는지, 그 힘이 사이클성인지 축적성인지를 스스로 잴 수 있다.
이 글은 특정 종목이나 ETF를 사라거나 팔라는 이야기가 아니며, 목표가나 방향성 전망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공급 부족’이라는 국면을 협상력·레버리지·캡티브 수요라는 개념으로 어떻게 읽고 재는지를 설명하는 교육 자료다. 실제 투자 판단은 각자의 책임과 별도의 검증 아래 이뤄져야 한다.